보로스는 거실의 소파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그가 현관으로 향하던 중 들려온 문이 열리는 소리와 굽소리. 굽소리는 그들의 집에서 평소 들릴리 없는 소리였다. 허나 그 굽소리와 함께 들어온 인물은 누구도 아닌 사유라였다. 오늘 하루종일 그가 그리워한 인물이었다.
"보로스, 다녀왔어요."
"어서와라."
이제는 자연스러워진 인사를 주고 받는 둘. 사유라는 현관에 앉아 거의 유일하다 싶은 굽이 달린 신인 부츠를 벗어낸다. 살짝 끈을 꽉 묶은 것인지 잘 빠지지 않아 낑낑거리는 연인에 결국 보로스가 곁에 앉는다. 그녀의 옆에 앉아, 한 쪽 손으로는 얆은 발목을, 다른 한 쪽은 부츠를 잡아 최대한 아프지 않게 신발을 벗겨준다. 그걸 한 번 더 반복하자 사유라의 발은 부츠에서 해방된다.
"고마워요."
"다음부터는 끈을 살짝 느슨하게 해야겠군."
"그러게요."
희미한 코웃음이 뿌리며 일어난 연인을 바라보는 푸른 눈엔 걱정이 드리워져 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사유라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발걸음을 옮긴다. 허나 그녀의 마음과 달리 몸은 솔직했다. 조금은 지끈거리는 발바닥에 아픔과 힘이 평소만큼 들어가지 않는 다리, 그리고 피로감에 약한 두통을 겪는 머리. 그것들이 겹쳐 오늘 조금은 먼 곳에 다녀온 여성은 걸음이 휘청인다. 결국 한 숨을 쉰 외계인은 익숙히 가녀린 몸을 들어올린다.
"무리는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
"음, 분명 헤어질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변명은 소용없다. 정말이지, 힘들면 다 받아줄텐데도... 너는 아직도 사양하는 건지."
"화나셨어요?"
"...... 화가 아니라 걱정이란 거다."
자신을 안은 채 거실로 향하는 그에 사유라는 미안함 어린 미소를 짓는다. 이제는 제법 지구의 언어가 능수능란해진 그에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마치 자신의 일인양 말이다. 그게 또 뭔가 우스워 미소를 짓는데, 이마에 따스함이 닿는다. 곧 그게 연인의 입맞춤이란걸 알아차린다.
"또 뭐가 좋아서 웃는지 모르지만, 너무 귀엽군."
"......"
"부끄러워하면 역효과다만."
"......."
오늘도 너무 천연덕스럽게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는 보로스.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들어와 조금은 익숙해진 그녀라도 심장을 관통당한다. 기쁘고도 부끄러워 더워지는 얼굴에 아무런 말도 못하자,이번에는 정수리에 키스하는 그에 사유라는 또 아무런 말도 못한다. 그저 그가 옮겨주는대로 얌전히 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이 폭신한 소파 위에 앉혀진다.
"어디가 피곤한지 아니면 아프거나 원하는거 말해라."
"음... 커피요."
"그걸로 된거냐?"
"충분해요."
자연스레 검은색의 코트를 벗겨주며 묻는 그. 어리광을 받아주겠다는 말에 사유라는 오늘 한 번도 마시지 않은 커피를 떠올린다. 그녀가 예전보다 쉬이 원하는 걸 얘기함에 내심 기뻐한다. 그럼에도 더 욕심을 부려 묻는다. 허나 그의 욕심에 여성은 부응해주지 못한다. 그 이상의 요구나 바라는 걸 그녀는 떠올리지 못했기에. 아직은 사유라란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란 어리광을 몰랐다. 나아졌다면 나아졌지만 보로스 기준에서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 그녀가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려줄거란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에.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네."
자신의 말에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답한 사유라에 보로스는 작게 웃고는 부엌으로 향한다. 익숙한 손길로 포트에 물을 넣고 스위치를 누른다. 그녀가 자주 커피를 마실 때 쓰는 컵을 꺼내어, 그 안에 스틱에 담긴 커피를 뜯어 넣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끓은 물을 부어 티스푼으로 저으니, 연인이 좋아하는 향이 올라온다. 그 향만으로 그녀가 웃어줄거란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보로스는 거실로 향한다.
"사유라."
"......"
"사유라."
"...아."
거실로 들어선 그의 눈에 들어온 연인은 소파 등받이 쪽에 몸을 기대지도 않은 채 고개를 꾸벅이고 있었다. 속으로 역시나라고 중얼거린 그는 커피를 탁상에 놓고는 사유라를 부른다. 2번의 부름에서야 눈을 뜬 그녀. 고개와 함께 연갈색의 눈동자가 느릿하고도 힘없이 움직여 자신에게 향함을 보로스는 본다.
"피곤하면 커피를 마시지 말고 자는게 좋겠군."
"저 졸았나요?"
"그래. 목이 부러질까 했다."
"... 그건 과장이예요."
"과장이든 뭐든 내게는 그렇게 보인거다."
"괜찮아요. 잠깐 좋은 것 뿐이니까. 커피를 마시면 나아질거.."
"안된다."
자신의 상태에 소홀히하는 그녀. 자신의 말이 과장이라며 말하는 사유라의 미소는 언제나보다 힘이 없다. 그 안에서 우울함이나 과거에 관련됨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의 걱정은 변함없다. 사유라는 그의 걱정을 앎에도, 아니 알기에 조금 더 밝은 톤으로 얘기한다. 허나 그녀의 말도, 커피를 향하던 손도 막힌다. 그리고 이마에 무언가로 덮혀진다. 커다랗고도 따스한 감각... 그의 손이었다.
"열이 살짝 있군."
"아, 역시."
"......"
"죄송해요."
"두통도 있겠지."
"... 네."
그의 진단에 무심결에 나온 말. 사유라는 목부터 올라오는 열에 미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허나 애써 말하지 않았는데, 그걸 들켜버린 순간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커다란 푸른 눈에 사과한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아픈걸 얘기하는 것에 대한 반성인지 두통에 대해서는 순순히 얘기한 그녀를 보로스는 가벼이 안아든다. 현관 때 보다 몸의 열이 올라 있었다. 그게 병으로 인한 열이 아닌 피로에 인한 열임을 이제는 알고 있는 그다. 조금은 무리하게 체력을 쓰고나면 일어나는 증세다.
"침대로 가자."
"아 그치만 씻어야..."
"적신 수건으로 대충 닦으면 된다. 그게 싫으면 내가 씻겨주마."
"괜찮아요. 그정도는 할 수 있다구요."
"감시할거다."
"네네."
정말 당장이라도 침대로 갈듯한 그를 말리는 그녀의 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눈쌀을 찌푸리는 보로스의 제안에 사유라는 쉽게 거절한다. 허나 감시는 허락한다. 어차피 세안이랑 양치뿐이니 무슨 문제리...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세안과 양치가 끝난 그녀는 편안 옷을 갈아 입는다.
"다 입었어요."
"다 본 사이인데..."
"안돼요."
"......."
"불만이 가득하시네요."
"내가 입히고 싶었다."
"... 밝힘꾼보다 욕심쟁이시네요."
"새삼 뭘..."
자신의 말에 뒤돌아 있던 그가 툴툴거리며 몸을 돌린다. 그 모습도, 목소리도 귀여워 사유라는 살풋 웃는다. 허나 그건 그거고 안되는 것은 안된다. 그렇기에 딱 잘라 말한다. 익숙한 표정에 대해 말하니 거리낌없이 욕망을 말하는 그에 침착함을 가지고 대응한다. 보로스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안아 침대로 옮긴다. 그녀를 침대에 눕혀 익숙히 옆에 눕는다.
"오늘 즐거웠나?"
"네, 즐거웠어요,"
"그 사장이란 녀석이 귀찮게 하지 않았나?"
"후훗, 아니예요. 오히려 여러가지를 알려주시고, 맛있는 것들도 가르쳐 주셨어요."
침대에 눕고 시작된 대화. 사유라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낸다. 조금은 열이 띤 숨결에도, 두통에도 연인이 오늘의 즐거웠던 일이나 신기했던 일들을 재잘재잘 얘기해 보로스는 귀여움과 질투를 느낀다.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자와 즐거웠기에. 그는 꽤나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아마 그녀가 주위와 연을 이어가는 한 계속 될 그것들.
"보로스, 다음에는 둘이서 가봐요."
"...... 그래. 네가 원한다면."
"보로스는 원하지 않으세요?"
"원한다. 당연한걸 묻는거냐."
"듣고 싶어서요."
"....... 조금씩 어리광이 능숙해지는군."
"누구 탓인데요."
사유라의 갑작스런 공격에 보로스는 머리가 날라가 버릴 것만 같은 감각을 느낀다. 터질려는 가슴을 용케도 참아내 미소로 기쁨을 표현한다. 그런 그를 모른 채 그녀도 미소를 짓는다. 외계인은 속으로 자신의 연인은 어쩌면 천연 속성이란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자신만 알면 충분하기에.
"열이 조금 더 올랐군."
"그런가요..."
"조금 흥분해서 얘기하닌 이런거다."
"으음, 그치만 즐거워서 그만..."
"이런걸 소풍 다녀온 아이 같다고 하던가."
"...... 어쩌면요."
"내일도 들어줄테니, 이제는 자라. 자야 열도 내리고, 두통도 없어질테니까."
조심히 볼을 만지니 더 오른 열. 이제는 볼도 꽤나 붉어져 있었다. 그런 자신의 상태를 몰랐다는 사유라의 반응에 그는 핀잔아닌 핀잔을 준다. 그에 아픈 이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그리고 결국 그의 말에 자신의 들뜸을 인정하는 사유라다. 그런 그녀에 보로스는 이불을 다시 한 번 턱까지 잘 덮어준다.
"내일 또 아픈 곳이 있다면 곧장 말해야 한다."
"네."
"그리고 당분간 그 높이가 있는 신발은 금지다."
"네."
"멀리 외출도 자제해라."
"네."
"내일은 나랑 하루종일 있는거다."
"네."
사유라는 그의 금지령이자, 부탁이자, 어리광에 웃는다. 그야말로 덩치 큰 어린아이 같았다. 뭐, 말만 그런거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뭐 어떠리. 자신에게는 무척 귀엽고도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입술에 스치듯 키스한다. 기습키스를 당한 보로스는 되값음인지 꾹하고 도장 찍듯이 키스한다. 언제나 보다 살짝 뜨거운 입술이 잘 느껴져 왔다. 연인의 몸을 생각해 입술을 떼어내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보로스."
"응?"
"내일은... 보로스도 오늘 있던 일 얘기해주세요."
"그래."
"... 안녕히 주무세요."
"아아, 잘 자라. 사유라."
또 다시 기습공격. 너무도 자신을 흔들고도 기쁘게 하는 그녀에 보로스는 넘치는 행복을 느낀다. 너무도 충족한 시간.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시간이자 행복. 그렇게 생각하며 보로스는 사유라를 제 품에 꼭 안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든 그녀. 보로스는 온 몸의 감각을 집중한다. 품 안의 그녀를 느낀다. 살짝 높은 체온, 작은 숨소리, 규칙적인 심장소리. 모든게 사랑스러워, 소중스러워 욕심만 늘어갔다. 악에 가까워질 정도로 커지는 욕심을 억눌러 내일을 기대한다. 사랑하는 그녀와의 시간을 상상한다. 그건 어떠한 것보다 우선적이었다. 분명 지금만큼이나 충족한 시간일거다. 그런 기대감에 소리없이 웃은 보로스는 사유라의 정수리에 입맞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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